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103화 봉준호x송강호, 레전드 탄생

by 양군

1991년 1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고 이영호군의 유괴사건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유괴 사건의 특성상 범인이 금방 자신을 드러냈고 43일 동안 무려 60여 차례나 협박전화가 걸려 왔음에도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3월13일 이영호군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공개수사로 전환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검거 작전 과정에서 경찰의 실책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망신을 사기만 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대구에 사는 초등학생 5명이 인근 산으로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 갔다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 언론이 도롱뇽 알을 개구리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이들은 '개구리 소년'으로 불리며 유명해졌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해면서 군인과 경찰이 총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지만 아이들은 끝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의 유골은 10년도 더 지난 2002년 9월에 발견됐다.

이영호군 유괴 사건과 개구리소년사건은 각각 2007년과 2011년 '그 놈 목소리'와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돼 또 한 번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어 줬다. 그리고 이 두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으로 꼽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이미 2003년 한 신예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을 캐스팅해 영화를 만들 정도로 거물이 된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는
1. 작품 선정 이유
2. 이 장면, 모르고 보지 마오
3. 영화 속 미친 존재감
의 순서로 구성됩니다.

대중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는 천재감독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의 봉준호 감독은 1993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몇 편의 단편 영화 연출과 선배 감독들의 조연출, 각본 작업등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던 봉준호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를 통해 장편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신선함과 썰렁함 사이에서 방황한 끝에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고 서울 관객 5만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 '살인의 추억'으로 데뷔작의 아쉬움을 훌훌 털어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를 각색한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속에 전국 52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성공했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통해 대종상과 대한민국 영화대상을 비롯해 4개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신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봉 감독은 학창시절 한강에서 직접 목격한 괴생명체를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써 제작비110억 원이 투입된 대작 '괴물'을 선보였다. 한국 영화로는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괴물'은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말그대로 괴물 같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큰 스케일에 적절한 풍자와 유머코드가 담겨 있는 '괴물'은 청룡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1999년 '마요네즈' 이후 한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던 김혜자님을 소환해 문제작 '마더'를 선보였고 2013년에는 제작비 400억 원이 투입된 또 하나의 대작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에드 해리스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가 캐스팅돼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 '설국열차'는 순수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만큼 봉준호 감독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믿음이 강하다는 뜻이다.

봉준호 감독은 현재 제이크 질렌할, 틸다 스윈턴, 릴리 콜린스 등이 출연하는 차기작 '옥자'를 준비하고 있다(옥자는 사람 이름이 아닌 유전자 개량을 받은 슈퍼돼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영혼의 단짝' 송강호는 이번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슈퍼스타 브래드 피트가 '옥자'의 총괄프로듀서로 참여했으니 봉준호 감독에게는 이 작품이 진정한 의미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x송강호, 레전드 탄생 - 양군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웰메이드 스릴러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의 첫 만남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스토리는 모 다큐 프로그램에 소개될 만큼 대단히 유명하다. 무명 시절 영화 '모텔 선인장' 오디션을 본 송강호는 탈락 소식을 접하고 의기소침했다. 이 때 송강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조감독 봉준호가 삐삐 음성 메시지로 송강호의 연기에 대해 칭찬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에 감동한 송강호는 훗날 그 조감독이 연출을 하는 영화에 캐스팅 제의가 오면 무조건 출연을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살인의 추억' 출연을 결정한 후 송강호는 그야말로 인생연기라 불러도 좋을 만큼 엄청난 호연을 보여준다. 송강호는 '살인의 추억' 최고의 명대사로 꼽히는 "밥은 먹고 다니냐?"를 비롯해 상당 부분을 직접 애드리브로 준비해 왔을 정도로 캐릭터 연구에 몰두했다. '살인의 추억'을 통해 3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쓴 송강호는 단순한 주연 배우를 넘어 한국 영화의 대체불가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다. 봉감독에게도 송강호에게도 '살인의 추억'이 남다른 작품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봉준호 감독의 별명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봉테일'이다. 흔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부분도 기가 막히게 캐치해 영화 속에 녹여 내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는 뜻이다(정작 본인은 쪼잔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는단다). 예를 들어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수사반장' 타이틀 음악을 따라 부르며 "노래가 좋아, 노래가"라고 감탄하는 장면은 시골 형사의 지적 수준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로 할까 '음악'으로 할까 한참 고민한 것이라고 한다(그런 걸로 고민했으면 충분히 쪼잔한데?).

사실 '살인의 추억'은 미제 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조금만 사전 정보를 아는 관객이라면 범인이 끝까지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사실 결말을 알고 보는 스릴러 영화만큼 시시한 장르도 없지만 '살인의 추억'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특히 구타로 자백을 받아내는 전근대적인 수사방식과 유전자 정보 분석 기술도 없어 샘플을 외국으로 보내는 당시 국내의 수사 현실은 관객들을 답답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살인의 추억'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는 1996년 극단 연우무대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20년째 공연되고 있는 대표적인 스테디 셀러 연극이다.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이 인기를 얻은 후에는 대학로에서 진행된 연극 공연이 전회 매진되기도 했다. 영화에서 3명의 용의자 역할을 각각 다른 배우들이 맡았던 것과는 달리 연극에서는 용의자 역할을 한 명의 배우(영화에서 2번째 용의자를 연기했던 류태호)가 전담한다.

봉준호x송강호, 레전드 탄생 - 양군
형사부터 용의자까지, 버릴 캐릭터가 없다

'살인의 추억'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박두만 형사와 서태윤 형사(김상경)지만 실질적으로 박두만 형사와 같이 움직이는 파트너는 배우 김뢰하가 연기한 조용구 형사다. 언제나 군화를 신고 다니면서 용의자를 구타해 자백을 받아내는 다혈질 형사 조용구는 백광호(박노식)가 휘두른 못이 박힌 각목에 맞고 파상풍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단순무식하고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긴 하지만 형사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인물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 '지리멸렬'부터 봉감독과 인연을 맺은 배우 김뢰하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까지 봉준호 감독과는 세 작품(장편 기준)에서 인연을 맺었다. 주로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악역 연기에 특화돼 있는 배우지만 의외로 대학 시절 도예학을 전공한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연 전문배우지만 후배를 잘 둔 덕에 대배우 송강호가 결혼식 사회를 봤다.

경찰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용의자 3인방 중에 가장 유명해진 배우는 단연 박해일이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으로 한정했을 때 관객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용의자 배우는 역시 백광호 역의 박노식이었다. 어릴 적에 입은 화상으로 얼굴이 흉하고 정신도 온전치 못해 동네 바보 취급을 받는 백광호는 박두만에 의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물증이 없어 영장이 기각됐다(알고 보니 사건의 목격자였음이 영화 후반에 나온다).

이향숙 사건을 목격한 백광호는 "향숙이 이뻤다", "향숙이 이쁘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데 백광호 캐릭터가 유명해지면서 이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흔히 영화 속에서 얼굴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본명보다는 캐릭터 이름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박노식처럼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 백광호도 아닌 '향숙이'로 기억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박노식은 '괴물'에 이어 2014년에는 1700만 영화 '명량'에도 출연하면서 은근히 뛰어난 선구안을 과시했다(그동안 출연한 영화의 관객수는 무려 5000만에 육박한다).

- 103화 끝 -

작가 정보 양군작가정보보기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그리고 여전히 90년대 대중문화를 사랑한다. 직업은 따로 있으나 칼럼 쓰기와 블로그 활동이 더 재밌는 글쟁이. (YG와는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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