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라디오, 개인주의자의 소소한 행복

56화 은하선의 '이기적 섹스'

by 문유석, 이예나

서점에서 넘겨보다가 재미있어서 사 온 은하선의 '이기적 섹스'는 읽어보니 뭐랄까, 자기계발서 내지 실용서에 가까운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계발 내지 실용'의 측면에서는 나와 연결고리가 적어서 휙휙 넘기기도 했다(예를 들어 아기자기 이쁜 여성용 섹스 토이 제품 설명 및 사용법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저자 본인의 경험담들. 성적 욕망을 처음 느낀 시기(5, 6세 때 장난감으로 성기 부분이 자극되었을 때), 사춘기 이후 적극적으로 성생활을 추구해 온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낀 생생한 감정들이다.

저자는 본인도 섹스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성적 욕구가 왕성한 편이고, 그걸 충족하기 위한 행동력과 성실성도 분명 평균 이상인 듯하다. 하지만 비슷한 특성의 남성들의 엄청난 행동력과 비교하면 대단할 것도 없다. 기본적으로 보통 남성들이 성에 눈뜨고 목말라하며 찾아다니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 부분은 특히 한국 남성들에게 교육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읽혔으면 싶기도 하더라. 킨제이 보고서가 여성의 성욕에 관해 리포트한 것이 1953년(인류 역사가 얼마인데 이때서야 여성의 성욕을 '발견'이라도 한 듯 세계적 파문을 일으킨 것 자체도 코메디)인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성은 40대 이전까지는 그닥 성욕이 없고 '사랑'때문에 성행위에 수동적으로 응한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넘쳐나게 있기 때문이다.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닌데도 연상되는 책이 있었다. 수천 킬로에 이르는 미국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엄청난 배낭을 메고 홀로 걸은 젊은 여성의 수기,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런 여행기에서 보통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 저자의 성욕과 관련된 장면들이다. 

홀로 산길을 걷는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리면서 콘돔 12개를 소중하게 챙기고,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통스러운 여정에 발톱이 하나씩 빠져나가다가도 트레일에서 마주친 젊고 멋진 여행자를 보며 성욕을 느껴 눈길을 떼지 못하고(그야말로 군침을 삼키는 듯한 생생한 느낌), 오랫동안 성생활을 못하다보니 평소라면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남성의 몸이 우연히 허벅지를 스친 것만으로 번개를 맞은 듯 성충동을 느끼고, 결국 그러다 오래 쌓인 욕구가 시원하게 해소되는 행운의 만남도 생기고. 

이런 과정이 배고파서 밥먹고, 목말라서 물 찾아 마시고, 구덩이 파서 볼 일 보고 하는 자연스러운 다른 욕구와 동일하게 너무나 당연하게 서술되어 있다. 역시 남성들이 비슷한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욕구와 별다를 것 없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여성 저자들이 쓴 여행기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이방인 남자들이 호감을 표시해 온 에피소드들은 매우 꼼꼼히 묘사되어 있곤 한데, 자신이 주체가 된 욕망에 대한 묘사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은교'나 '롤리타'의 여성 버전 작품이 없는 것처럼.

은하선의 '이기적 섹스'

1999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 개봉 후 인터뷰 기사에서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인상적이어서 그 부분만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22세의 모델인데 감독의 설득으로 첫 영화를 찍어 44세의 설치미술가 남성과 온갖 섹스신 연기를 했던 여배우 김태연에 대한 기자들(대부분 3, 40대 남성)의 질문은 '정말 다 벗었냐' '공사(성기 부분만 뭘 붙여서 가리기)를 안 했다는데 사실이냐'에 치열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같은 질문이 쏟아지자 김태연은 약간 지친다는 표정으로 "네. 안했어요.. 거기 뭐가 있는지 다들 알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이 영화를 둘러싼 온갖 구린 풍경 중에서 유일하게 촌스럽지 않은 장면이었다. 난 그냥 야동을 보고 싶어서 이 영화를 봤는데, 만든 사람들은 무슨 대단한 전복적인 예술을 한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있더라. 무슨 사드 후작의 시대 'O의 이야기'가 출간된 시대도 아니고 21세기 직전에 그냥 암컷 수컷의 다양한 짝짓기 장면을 찍으면서 이상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다 붙이려는 중년 남성 감독과 중년 남자 배우 '이런 영화를 개봉하면 한국이 성적으로 개방되었다는 착각을 일으켜 매춘관광을 유발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중년 남성 기자.

그리고 이 영화 원작소설을 쓴 죄로 소설가(장정일)를 구속하는 사회.. 그냥 가치 판단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소동이 구리고 촌스럽다는 감각적 혐오감이 앞섰다. 그런 풍경 속에 마네킹처럼 그저 놓여있는 것 같이 보였던 22세의 무명 여배우가 던진 한 마디가 어찌나 상쾌하던지.

이런 얘기를 쓰고보니 마치 철지난 초보적 페미니즘 얘기를 새삼스럽게 꺼내고 있는 것 같은데, 자랑스러운 일은 못되지만 난 페미니즘 관련 책도, 여성 관점의 성에 관한 책도 읽어 본 적이 없다(고딩 때 에리카 종 책을 펴고는 야한 부분만 골라 읽고 덮은 정도ㅠ). 솔직히 별로 재미도 없고, 난 천성적으로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단지 소싯적부터 나를 지배해 온 '남이사' 정서가 있을 뿐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각자 자기 욕구를 추구할 자유가 있는 것인데 합리적 이유 없이 그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압력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해도 웃긴 건 웃긴 거니까.

- 56화 끝 -

작가 정보 이예나그림작가정보보기 멋있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좋아하고 자신 있는 사람.
작가 정보 문유석작가정보보기 소년 시절 좋아하는 책과 음악만 잔뜩 쌓아놓고 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개인주의자. 판사로 일하고 있고 '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유감'이라는 책을 썼다.
다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