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흔살은 안녕하십니까

2화 40대는 사랑을 찾아 나서기엔 늦은 나이다

by 신기주, 최신엽
40대는 사랑을 찾아 나서기엔 늦은 나이다 - -

그녀는 통금 시간이 있는 여자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하도 엄하셔서 나이 서른에도 통금 시간 10시만큼은 꼭 지킨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통금 얘기를 꺼내면서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남자들은 통금 있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어쨌든 통금 있는 여자와 만나보기로 했다. 여자는 통금을 안 지켜주는 남자들이 싫다고 했다.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통금을 안 지켜줄 도리가 없었다. 좋은 남자는 아니지만 매너 없는 남자가 되긴 싫었다.

40대 남자한텐 여자의 통금을 지켜주는 게 별 일이 아니다. 여자와 밤을 보낸다는 게 더 이상 신비한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40대 남자는 저녁 10시 이후에도 바쁘다.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거나 내일을 준비하거나 친구들과 늦은 술자리를 가질 수도 있다. 그때부터 가장 사적인 인생이 시작된다. 오히려 여자 친구가 일찍 집에 들어가주면 고맙다.

처음엔 그녀도 칼 같이 통금을 지켜줘서 고마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술을 좋아했다. 그녀의 집 앞에 있는 오뎅 집과 치킨 집이 단골 데이트 코스가 됐다. 10시 5분 전까지 술을 마시다 들여보내곤 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가 먼저 통금을 어기기 시작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 핑계도 다양했다. 어느 날은 엄마한테 마이피플 했더니 아빠가 일찍 주무신다며 1시간쯤은 말미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은 이유도 없이 그냥 안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다. 통금은 11시가 되더니 12시가 되더니 나중엔 새벽 1시도 좋고 2시도 좋게 됐다. 어리둥절했다.

사랑에 모든 걸 거는 제임스 본드

‘007 카지노로얄’은 인간 제임스 본드가 냉혈한 007이 되는 이야기다. 제임스 본드가 피도 눈물도 없는 첩보원이 되는 건 한 여자 탓이다. 제임스 본드는 베스퍼 린드한테 첫 눈에 반한다. 지적이고 관능적이다. 제임스 본드는 베스퍼 린드를 얻기 위해 목숨도 걸고 나라까지 버린다. 베스퍼도 제임스한테 넘어간다.

사실 베스퍼는 첩자였다. 숨겨둔 남자도 있었다. 제임스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가 아차 실수로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베스퍼는 제임스와의 사랑마저 이용한다. 덕분에 손쉽게 원하는 걸 얻는다. 베스퍼도 괴로워한다. 끝까지 숨겨둔 애인도 포기하지 못하고 제임스를 믿지도 못한다. 비겁하다.

베스퍼가 제임스를 사랑하는 건 진심이었다. 여자를 사랑할 때 모든 걸 건다. 가진 게 없는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면승부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조차 계산을 한다. 남자한텐 사랑의 최종 목표가 섹스이기 마련이지만 여자한텐 사랑도 섹스도 수단이기 십상이다. 비겁하다. 여자가 나쁜 게 아니다. 여자는 그렇게 창조됐다.

베스퍼는 제임스 앞에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이 제임스를 사랑했다는 걸 증명한다. 덕분에 제임스 본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절대 고독해진다. 여자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여자의 본질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베스퍼는 제임스와의 첫 만남에서 말한다.

“당신한테 여자는 삶의 동반자가 아니라 쾌락의 대상일 뿐이겠죠.”

정작 남자가 여자를 삶의 동반자로 선택했을 때 여자는 남자를 삶의 운반자로 여긴다. 아이까지 생긴다면 말할 것도 없다. 남자는 여자를 원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필요하다.

통금은 원래부터 없었다. 그녀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였다. 20대에 놀만큼 놀았다. 클럽도 다닐 만큼 다녔고 술도 마실 만큼 마셨고 돈도 쓸 만큼 썼다. 이젠 집에서 아빠 돈 쓰면서 빌붙어 살기가 눈치가 보였다. 능력 있는 남자를 하나 잡아야 할 시기였다. 아빠에서 남편으로 보호자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나이 많은 남자란 모름지기 정숙한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고 단정지었다. 요조숙녀로 변신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통금 있는 여자로 위장했다. 저녁 10시 이후에도 함께 있고 싶으면 결혼해야 한다는 시위였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다. 그녀는 자신의 교환 가치를 놓이기 위해 남자가 원하는 그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자기가 아닌 자기를 연기했다. 좋게 말해 내숭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사기였다.

10대 남자한테 여자는 신비하다. 10대 남자는 자신이 상상한 데로만 여자를 바라본다. 20대 남자한테 여자는 욕망이다. 성욕에 지배당하는 20대 남자는 섹스를 위해 여자한테 영혼까지 팔 수 있다. 30대 남자한테 여자는 요물이다. 안정이 필요한 30대 남자 앞에서 여자는 결혼이라는 보상을 바라며 사기 아닌 사기를 친다.

40대에게도 진정한 사랑이 올까?

40대 남자한테 여자는 배덕자다. 여자는 신비하지도 섹시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또 하나의 불쌍한 중생일 뿐이다. 그렇게 여자의 본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오히려 기나긴 고독이 시작된다. 사랑에 빠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이 멀어야 시작된다. 40대 남자한텐 불가능에 가깝다.

40대 남자한텐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여자가 필요하다는 게 비극이다. 남자가 40대가 되면 비로소 나머지 40년을 함께 살 여자를 원하게 된다. 남자를 통해 가방을 사고 차를 얻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경제적 원조를 얻고자 하는 여자가 필요한 게 아니다. 함께 모든 걸 버릴 여자가 절실하다. 정작 그런 여자는 드물다. 자본주의는 연애와 결혼을 엄청난 M&A로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약자이기 마련인 여자는 이런 인수합병 기회를 포기하기 어렵다. 남자보다 그만큼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40대 남자는 제임스 본드가 될 수밖에 없다. 일에 몰두하며 잘 차려 입고 다니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이기적인 삶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타적인 삶보다 여자를 꼬실 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M&A를 기대하며 실사를 허락한 여자한텐 막판에 계약 파기를 통보하면 그만이다. 어쩌면 40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나서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40대 남자는 경제적 가치가 높고 모든 연애는 거래로 변질되기 쉬워서다. 거래보단 감정이 우선이었던 20대에 또래 여자와 동반자 관계를 맺지 못했다면 이미 인생에서 사랑 분야는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40대 남자한테 구원의 여신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마흔에도 여자를 진정 사랑하려고 애쓴다면 결국 사기를 당하게 된다. 잘못하면 남자의 눈에 들기 위해 분식회계를 하고 통금을 위장한 여자한테 인생을 저당 잡히게 된다. 제임스 본드는 그 뒤로 여자와 데이트를 할 때면 베스퍼란 이름의 보드카 마티니를 즐겨 마셨다. 그렇게 매번 베스퍼가 가르쳐준 쓰디쓴 교훈을 삼켰다.

- 2화 끝 -

작가 정보 신기주작가정보보기 저널리스트. 지금은 Esquire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